거기 저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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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12-02 01:32 조회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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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저수지가
2주 전에 고향 군산에 다녀왔다.
평소 존경하던 고모님이 소천하셔서 조문차 갔다.
발인을 마치고 화장터로 갔다.
그 화장터에 가면 꼭 보는 곳이 있다.
화장터 옆 저수지다.
그 저수지는 나에게 충격과 함께 확실한 기억을 새겨 놓은 곳이다.
고 3학년 때 일이다.
가끔 가던 도시 교회에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함께 교회 목사님께 인사차 들렀다.
교회에 들어서는데 우리를 보시면서 “마침 잘 왔다.” 하시면서 차에 타라는 것이다.
그 차는 여느 차가 아닌 영구차였다.
차에 타보니 관 하나가 실려져 있었다.
누구의 관인지 묻기도 전에 전도사님이 설명하신다.
“이 관은 여자의 관인데 이 여자는 혼자 살았다가 연고가 없이 갑자기 사망해서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시신을 태운 영구차는 굽은 산길을 따라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한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한 산속의 화장터였다.
그날은 날씨가 몹시도 추웠다.
노화된 화장터는 금방 뭐라도 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시체를 태우는 기계 소리인데 그 소리는 항구를 떠나는 뱃고동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들렸다.
그때는 시설이 지금보다 턱없이 형편없는 때라 맘만 먹으면 화장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장터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유리 구멍으로 불꽃이 보였다.
시신을 태우는 화구의 불꽃이었다.
‘아마도 지옥은 저보다 더할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호기심과 무서움을 안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정말 무서웠다.
수습하다가 채 챙기지 못한 뼛조각들, 심지어 이빨 조각도 있었다.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 그 여자분의 화장을 마치고, 뼈를 수습해서 우리는 화장터 앞에 있는 저수지로 가서 뿌려 드렸다.
어린 나이에 했던 그 경험은 충격 그 자체로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려 30여 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는 잊혀졌던지 아니면 기억 속에서 빛바랜 수채화처럼 흐릿해져서 잘 모르겠다.
화장터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시간에 화장터 주변을 보는데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저수지는 흐릿해져 가던 기억을 선명한 포토 사진을 만들어서 보낸다.
완전 생생하게 마치 어제 일처럼 너무너무 선명하게 들어왔다.
연고 없이 세상을 떠났던 그 여자분.
철없이 화장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던 녀석들.
모두들 고개를 떨구며 숙연한 모습으로 뼈를 담은 상자를 따라 저수지로 향하던 그들.
거기 저수가 있어서….
거기 저수지가 없었더라면 그 기억은 흐릿하다 못해 연기처럼 사라졌을 터인데
거기 저수지가 있기에 기억을 살려내고 있다.
불현듯 10여 년 넘게 교회에 안 오신 모 권사님 생각이 난다.
낙상했는데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서 수술해야 하는데 너무 걱정이 된다고 하셨다.
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싶은데 차마 본인은 직접 전화를 못 하고 지인을 통해서 알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는 권사님은 몸 둘 바를 모르신다.
그러면서 10여 년 전 자신이 교회 생활을 했던 일들을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여기 없었더라면 이 권사님이 10여 년 전 자신의 신앙생활을 끄집어낼 수 있었을까?’
다행이다.
내가 여전히 여기 있었기에 희미해져 가던 이분의 신앙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어서 말이다.
그렇다.
나는 목사다.
나의 의무는 첫사랑이 희미해져 가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첫사랑을 다시 선명하게 하는 일이다.
나는 새삼 알았다.
다른 방법과 수단은 필요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그냥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면 된다는 것을.
나는 내가 이 사명을 마치는 날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그냥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련다.
이것이 나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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